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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천년학 촬영지를 찾아서

선학농장 최귀홍 2007. 7. 27. 23:00

 

<수필>

천년학 촬영지를 찾아서

장 병 호

 

임권택의 영화 <천년학>을 보고나서 그냥 있을 수가 없었다. 시간이 지나도 영화의 장면들이 자꾸 뇌리에 떠올라서 촬영지를 보고 와야 직성이 풀릴 것 같았다. 그래서 일요일 아침 아내와 함께 장흥으로 차를 몰았다.

회진의 천년학 촬영지는 실상 나에게 초행은 아니다. 작년 가을 여기서 영화를 찍는다는 소문을 듣고 고향에 다녀가는 길에 한번 들렀다. 촬영 장소를 미리 보아두면 나중에 영화가 더 재미있으리라는 생각을 해서였다.

아닌 게 아니라 영화에 주막집이 나오자 반갑기 그지없었다. 그런데 영화를 보고나서도 주막집을 한 번 더 보고 싶고, 배경이 되는 학산의 모습도 다시 확인하고 싶은 것은 무엇 때문일까.

출발한지 두 시간이 채 못 되어 회진면에 들어섰다. 면소재지를 지나는데 ‘천년학’이란 식당이 보인다. 동작 한번 빠르구나! 역시 영화 촬영지다운 발상이라는 생각이 든다.

면소재지를 벗어나 조금 가니 새로 난 포장도로가 나온다. 그 길을 타고 솔숲을 돌아가자 빨강색 양철지붕의 외딴 집이 한 채 눈에 들어온다. 바로 이곳이 바로 천년학을 찍은 주막집 세트이다. 대개 영화 세트장이라면 한옥마을이나 저자거리, 궁궐 등 규모가 큰 것들이 많은데 이곳은 집 한 채만 달랑 있어, 먼 데서 온 이들이 ‘에게, 겨우 이거야?’하고 실망을 할지도 모르겠다.

주막은 바다를 막은 제방 위에 지어져 있다. 길가에 차를 멈추고 올라가니, 아이들을 데리고 온 젊은 부부가 건물을 배경으로 사진을 찍고 있다. 지붕이 양철이라 그런지 주막이라기보다 시골 방앗간 느낌이 많이 난다. 그리고 한쪽에 2층 다락을 올려놓아서 얼핏 일본식 가옥의 냄새가 나기도 한다. 그러나 주변 환경과 잘 어울리는 터라 세트장이란 느낌은 전혀 들지 않고 오래전부터 이 자리에 있어온 건물로만 보인다.

이 주막은 영화에서 매우 큰 비중을 차지하고 있다. 영화 도입부에서 누이의 행적을 찾는 주인공 동호가 하룻밤을 묵는 곳이 이곳이다. 그리고 옛날로 거슬러 올라가 어린 송화가 동네사람들 앞에서 창을 하는 장면이나, 아비 유봉이 마당에서 소리를 하는 동안에 집안에서 주막집 아들과 동호가 엎치락뒤치락 주먹다짐을 하는 곳이 모두 이 주막을 배경으로 한다. 특히 영화의 줄거리가 주인공이 주막 주인과 밤새 술잔을 기울이며 누이의 소식을 전해 듣는 방식으로 전개되기 때문에, 이 주막이야말로 <천년학>에서 없어서는 안 될 중심 배경이라고 할 수 있다.

주막 안이 어떤가 보려고 하니, 앞문에 덧문을 대고 못질을 해놓았다. 이런 불친절이 있나! 멀리서 온 관광객들에게 친절한 설명을 해줄 안내원을 배치하지는 못할망정 출입을 못하게 막아놓다니! 할 수 없이 주막을 배경으로 사진만 몇 장 찍었다.

“천년학 영화 봤어요?”

셔터를 눌러달라며 젊은 부부에게 물었다. 아이 아빠가 아직 못 봤다며 고개를 가로젓는다.

“꼭 한번 보세요. 정말 볼 만합디다.”

여기를 오려면 미리 영화를 보는 것이 좋겠다. 아름답고도 슬픈 영화 천년학! 아직도 내 귓가에는 ‘꿈이로다!’며 ‘갈까부다!’와 같은 여주인공 송화의 절절한 소리가 맴돌고 있다. 그리고 누이의 행방을 좇아 떠도는 동호의 간절한 눈빛이며, 서로 그리워하면서도 막상 만나서는 가슴 속의 말을 못하고 다시 헤어져야 하는 남매의 안타까운 모습들이 가슴 속에 ‘짠한’ 여운으로 남아 있다. 그래서 영화를 보고나서 이곳에 와야 영화의 감흥이 상승작용을 일으켜 더욱 뜻깊은 답사가 될 것 같다. 나도 작년 가을에 이곳을 다녀가며 별다른 느낌을 받지 못했던 것이 사실이다.

집 한쪽에 훤칠한 노송 한 그루가 서 있다. 학이 새끼를 치고 나간 듯 새집까지 하나 달고 있는데, 솔잎은 없고 앙상한 가지만 늘어뜨린 것이 애석하게도 말라죽은 지 오래이다. 세트장을 지을 때 어디서 옮겨 심은 모양인데 뿌리를 다쳐서 그랬을까, 아니면 토질이 맞지 않았을까.

이게 살았더라면 주막의 경관이 훨씬 나아지겠다는 생각을 하다가, 아니지 이렇게 죽어 있는 것도 무방하지 않겠느냐는 생각이 든다. 왜냐하면 영화에서 주막주인이 이곳 바다가 막힌 뒤로 학이 날아오지 않는다고 말하는 것을 생각할 때, 이 소나무도 학이 찾아오기를 기다리다 결국 고사하고 말았다는 것이 논리적으로 그럴듯하기 때문이다.

낮은 돌담이 둘러쳐진 뒤란으로 돌아가니, 이게 웬일인가! 뒷문이 열려 있다. 안으로 들어가니 영화에서 주모가 도마질을 하다가 주인공을 맞던 주방이며, 주막주인이 송화가 맡겨놓은 북을 들고 다락에서 내려오던 나무 계단 따위가 보인다. 영화와는 달리 주막 안이 매우 비좁은 느낌이 든다.

방도 세 칸이나 되는데 가만히 보니 이게 장난이 아니다. 세트장에 가보면 알지만 대개 겉보기만 그럴듯하지 눈에 띄지 않는 부분은 모두 엉터리이다. 흙벽도 쿵쿵 울리는 베니어판에 색깔만 대강 칠해놓은 것을 보며, 영화란 결국 눈속임이로구나 하는 것을 깨닫는다. 그런데 이 집은 방이며 마루며 모든 것이 견실하게 꾸며져 있는 것이 세트장 하나도 허투루 만들지 않는 임권택 감독의 장인정신을 엿볼 수 있다.

뒤란에는 본채에 잇대어 마루가 하나 꾸며져 있다. 이것을 보니 더욱 반갑다. 이마루가 바로 영화 끝부분에 동호가 누이의 환영과 마주앉아 북장단을 맞추던 장소가 아닌가. 이 때 뒷간에서 일을 보던 주막주인이 문틈으로 이 광경을 내다보는데, 돌연 간척지 땅에 바닷물이 밀려들며 저 학산 아래 벌판이 순식간에 바다로 변하는 것이다. 그리고 이 때 남매를 상징하는 두 마리의 학이 날아들어 사이좋게 어울리는 가운데 영화는 막을 내린다….

영화에서 나는 이처럼 들판이 바다로 바뀌는 장면에 크게 감탄을 했다. 그리고 영화 초반부에 어린 송화 남매가 아비를 따라 소리 공부를 하던 시절에도 이 주막은 바다로 둘러싸인 곳으로 나온다. 아무리 컴퓨터그래픽이라지만 실제 배경은 들판인데 어떻게 저리 감쪽같이 바다로 둔갑시킬 수 있는가. <천년학>에서 가장 아름다운 장면이 매화꽃이 눈처럼 날리는 백사노인의 임종 장면이라면, 가장 경이롭고 감동적인 장면은 육지에 바닷물이 밀려들면서 두 마리의 학이 날아드는 이 마지막 장면이 아닌가 싶다.

영화에서 학산이라고 부르는 마을 뒷산도 매우 인상적이었다. 학이 날개를 펼친 모양의 저 산이 과연 현장에 있는 산일까? 작년에 왔을 때 주막집만 살펴보았지 주변의 산은 미처 눈여겨 살피지 못했다. 그래서 영화를 보고나서 그것을 확인해보고 싶은 충동이 더욱 커졌다.

들판 건너 학산을 유심히 바라본다. 머리 부분이 뾰족하고 좌우로 완만한 능선이 펼쳐진 것이 참으로 학의 모습 그대로다. 컴퓨터그래픽이 아니라 실재하는 산임을 알 수 있다. 도대체 임권택 감독은 이런 산이 있는 것을 어찌 알고 여기다 세트장을 지었을까.

그런데 학산 자락에 웬 보자기를 펼쳐 놓은 듯 노랑빛이 선명하다. 요즘 이곳에 유채꽃이 피었다는 소문이 들리던데 바로 저기가 아닌가! 여기까지 와서 저곳을 안 볼 수가 있나 싶어 그쪽으로 차를 몰았다. 마을 어귀에 차를 멈추니, 아저씨 한 분이 다가와 인사를 한다.

“어서 오십시오. 이 마을 이장입니다!”

벌겋게 탄 얼굴에 건강미가 넘친다.

“수고하십니다. 천년학을 보고 배경이 하도 좋아 구경을 왔습니다.”

“찾아주셔서 감사합니다. 저도 그 영화에 잠깐 출연했습니다.”

“그래요? 어느 부분에 나오셨던가요?”

“송화 어렸을 적에 주막집 마당에서 창을 하는 대목 있잖아요? 거기 마당에 둘러앉은 사람들 가운데 제가 끼어 있지요.”

그리고 이장님은 이 마을이 산 아래 있다고 하여 본디 ‘산저마을’인데, 이번에 <천년학>과 관련해서 ‘선학동’으로 개명을 했다고 말한다. 마을 뒷산도 본디 다른 이름이 있었는데 영화에 맞추어 학산으로 바꿔 부르기로 했단다.

“유채밭은 언제 이렇게 가꾸었어요? 엄청나게 넓네요.”

“천년학 세트장만 가지고는 볼거리가 빈약할 것 같아 관광객들이 더 머물렀다 가라고 올해부터 심었습니다. 한 3만여 평 되지요.”

원래 다른 농작물을 심던 것을 임자들한테 얼마간 보상을 해주고 유채밭을 조성했는데, 덕분에 오는 사람들마다 좋아한다고 고무된 표정이다.

“그런데 임권택 감독이 천년학 세트장을 어떻게 해서 여기다 지을 생각을 했을까요?”

아까부터 궁금했던 사항을 물어보았다.

“그거야 이청준 선생이 이곳을 배경으로 소설을 썼기 때문이지요. 천년학의 원작이 <선학동 나그네>잖아요. 그 소설의 무대가 바로 여기랍니다.”

이장은 이곳 사정은 무엇이든 손바닥을 보듯 자신 있게 대답한다.

“이청준 선생이 소설을 쓸 때만 해도 영화로 만들어지리라고는 예상하지 못 했을 것 아니예요?”

“물론 그렇지요. 그런데 이청준 선생 고향이 바로 저 너머 진목리거든요. 이 들판길을 걸어서 초등학교를 다녔기 때문에 이곳에 대한 인상을 가지고 있어서 소설 무대로 삼았던 거지요.”

그래서 영화를 찍기 전에 작가와 임권택 감독이 이곳을 다녀갔고, 영화를 촬영할 때도 자주 왔다고 한다. 그 말을 들으니 영화에서 작가가 잠깐 시골노인의 모습을 하고 버스에서 내리는 장면이 생각났다. 눈썰미가 없는 사람은 무심코 넘어갔을지 모르지만 내가 어찌 그 장면을 놓치랴!

이장님의 이야기를 듣고 나서 유채밭을 구경하러 올라갔다.

잉잉대는 벌 울음소리와 싱그러운 봄풀냄새가 어우러진 가운데 유채향기가 코를 자극한다. 얼마만인가. 이렇게 풍성한 유채꽃을 본 것은! 아마 제주도 신혼여행 이후로 처음이 아닌가 싶다. 그런데 유채꽃의 명소라는 제주에도 이만한 유채밭을 찾아보지 못했던 것 같다.

노란 꽃세상에 들어오니 자연히 기분이 흥겨워지고 구경 온 젊은 아가씨들이 더욱 예뻐 보인다. 아내를 유채밭에 들어서게 하고 학산 봉우리가 나오도록 사진을 찍었다. 바다 쪽으로 바라보니 노란 유채꽃과 푸른 봄바다가 어울려 한 폭의 풍경화를 연상케 한다. 군데군데 세워놓은 원두막이 운치를 더한다.

유채밭 사이로 난 산책로를 걷다보니 한 원두막에 아주머니들이 여럿이 모여 있다. 꽃구경을 나온 분들인가 했더니, 이곳 선학동 주민들이라며 손님들을 상대로 동동주와 파전을 팔고 있단다. 그리고 우리 내외에게 자리를 내주며 모두 원두막 아래로 내려가 버린다. 원두막 아래는 포장이 깔려 있는데, 여러 가지 음식재료와 그릇, 가스버너와 프라이팬 따위가 널려 있다.

나는 술을 못하는 터라 파전을 한 접시만 시켰다.

“한두 분이면 족할 텐데 왜 이렇게 많이 와계셔요? 배보다 배꼽이 더 큰 것 같네요.”

“돈벌이가 아니고 그냥 재미 삼아 하는 거예요. 그래서 함께 거들고 있지요.”

아주머니들이 서둘러 음식을 내오는데, 파전뿐만 아니라 두부에 김치, 찰밥까지 곁들였다.

“이거 웬 찰밥인가요?”

“이장 사모님이 우리 먹으라고 해온 건데, 많이 있으니까 드세요.”

얄팍한 상술이 아니라 시골다운 넉넉한 인심이 느껴진다. 이렇게 되면 이건 간식이 아니라 아예 점심을 먹는 셈이다.

우리 내외가 앉아 있는 것을 보고 다른 구경꾼들도 원두막에 올라온다. 아주머니들이 신나게 파전을 지지고 음식을 차리는 모습이 소꿉장난을 하는 어린애들같이 순박해 보인다. 원두막을 나오며 동동주 값까지 치렀다. 후한 인심을 보고 내 마음도 넉넉해졌나 보다. 노랑 유채와 함께 천년학의 여운이 4월 들판에 무르녹고 있었다. [끝]

 

 

출처 : 순천문인협회
글쓴이 : 장병호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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